각성의 흐름 – 머나먼 민주의 길 위에서 외치는 자유의 고함

전시 소개

대만 민주 발전의 여정은 멀고도 험난하였다. 백 년 전부터 대만인들이 추구하였던 민주는 단순한 참정권의 획득이 아닌 입법정치, 권력분립, 법치주의를 포함하여 인신(신병), 언론, 출판, 집회와 결사의 자유 등 기본적인 인권이 보장되는 민주였다. 이러한 목표 달성을 위한 인권운동의 파도는 일파만파로 퍼져 국민들을 일깨웠고, 고개를 꼿꼿이 들고 앞을 향해 나아갔다. 물론 이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들을 마주하였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머나먼 대만 민주화의 여정에서 자유를 쟁취 하자는 외침은 시종일관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라는 과실은 많은 선구자들의 피와 눈물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룩한 것으로 우리는 이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며 민주의 가치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1. 계몽전기의 흐름: 일제식민시대(1895~1945년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 아래 대만인들은 민주를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식민지 당국에 ‘대만의회’ 설립을 요구하였고, ‘대만의회설치청원운동’을 펼쳤다. 대만인들은 자체적으로 『대만청년』,『대만』, 『대만민보』, 『대만신민보』 등의 간행물 출판을 통해 국민들을 계몽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대만문화협회를 설립하여 대만 문화의 발전을 추구하였다.

그후 린센탕(林獻堂), 짱웨이쉐(蔣渭水) 등 사람은 ‘대만민중당’을 설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등 권리를 요구하였다. ‘대만지방자치연맹’의 설립은 지방자치의 실현을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1935년  대만에서 성인남성에게만 선거권이 제한되었고 반관반민 형식의 선거로 지방자치가 실현되었다.

시대배경 

1895 대만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1910~1920년대 일본 다이쇼시대/1911 중국신해혁명/ 1918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 ‘14개조 평화원칙’을 밝히면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을 제창/1919 조선 3•1운동/1919년 중국 5•4운동

대만민주의 흐름

1921 대만 의회 설립 청원 운동(1921~1934), 대만문화협회(1921~1931)

1923 치경사건(대만의 일제 식민통치 시기 정치적 사건)

1927 최초의 정당: 대만민중당(1927~1931)

1930 대만지방자치연맹(1930~1937)

1935 첫 번째 선거: 대만시회와 지방협의회 의원 선거

간행물

1920<대만청년>, 1922<대만>, 1923<대만민보>, 1930<대만신민보>


2. 민주의암중 모색: 냉전과 권위주의 체제(1945~1970년대)

1945년 일본의 패망 후 중화민국이 연맹군을 대표하여 대만의 통치권을 수복하게 된다. 하지만 대만성 행정장관의 본성인과 외성인에 대한 차별대우 그리고 각종 문화적 충돌로 인해 본성인과 내성인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결국  담배판매에 대한 부당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1947년 2•28사건이 폭발하게 되었다.

국공내전이 격렬해지면서 내부사회통제 강화를 위해 1949년 중화민국정부는 “대만성 계엄령”을 선포하고, 집회, 결사, 언론, 출판, 여행 등 헌법에서 보장된 개인의 권리를 제한하였고, 다. 또한 군법에 의해 민간인들을 재판할 수 있었다. 계엄 시기가 38년 동안 지속되었다.

1946년부터 국민당 정부에 의해 실시된 각 급 지방선거에서 일제시기에 남성에게만 허가되었던 선거권이 남녀모두에게 공평하게 부여되었다. 하지만 1950년부터 실시된 현시급(縣市級) 지방자치선거에서 선거의 조작행위가 빈번하게 이루어졌으며 또한 중앙급 민의대표는 법치의 유지를 핑계로 선거는 장기간 정기적으로 실시되지 않았다. 

당대의 지식인들은 잡지『자유중국』을 통하여 시국을 비판하였고 1960년 새로운 정당의 창당 시도는 레이전(雷震)등 사람들이 당국의 체포를 받게 되면서 무산되었다. 같은 해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의 부분적 조항이 수정되었고, 총통과 부총통은 헌법의 연임제한을 받지 않으며, 결국 장중정(蔣中正장개석)은 5번의 총통직을 연임한 후 병으로 사망하게 되었다.

시대배경 

1945 일본패전, 중화민국정부의 대만통치권 수복/ 1949 국공내전에서의 중국공산당 승리 그리고 국민당의 대만 접수/ 1950 한국전쟁, 미국 제 7함대의 대만보호/ 1966 중국문화대혁명

대만 민주의 흐름

1946 각급민의대표선거

1947 2•28사건

1948 <동원감란시기임시조관>반포, 1949<대만성 계엄령>반포

1949 『자유중국』잡지창간

1950 지방자치선거, 1957 ‘오룡일봉’ 대만성 임시성의회 의원에 당선

1960 정당성립의 실패: 중국민주당

1964 대만인민자구운동 선언

1968 쉬스셴(許世賢) 6대 자이시(嘉義市)시장 당선

 

3. 새로운 흐름:당외충돌(1970~1980년대)

1971년 중화민국이 유엔에서 퇴출되면서 대만의70년대 정치는 서막이 열렸다. 장중정(蔣中正장개석)은 1975년 서거하였으며, 부총통 옌자간(嚴家淦)이 총통직을 이어받았고, 1978년에장징궈(蔣經國)가 총통으로 선출되었다.같은 해 연말, 미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를 위해 중화민국과 단교를 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장징궈(蔣經國)는 즉시 긴급명령으로 선거를 중단한다고 발표하였고 국민당에 대항하는 ‘당외’ 인사들은 국민당과 싸울 수 있는 경선의 무대를 잃게 되었다.

1979년 연말, 당외인사들은 메이리다오(美麗島) 잡지사를 중심으로 가오슝에서 세계인권선언일에 맞춰 가두행진을 하였을 때 국내외를 뒤흔든 ‘메이리다오(美麗島)’ 사건은 이렇게 폭발하게 되었다. 사건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은 반란죄에 해당하는 사형을 선고 받았는데 각계각층의 분주한 움직임은 국제적 관심을 받게 되었다. 때문에 정부가 공개 재판을 동의함에 따라 대만인들은 민주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정신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었다. 그후 변호사와 수난자 가족들의 민주정신을 이어받아 1986년 ‘민주진보당’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듬해 중화민국 정부는 계엄령 해체를 선언하였다.

*계엄령 시대에는 ‘당진(정당 설립의 금지)’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국민당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당외’ 인사를 자처했다


시대배경 

1971 중화민국 유엔퇴출/ 1975 장개석 서거/ 1979 미국 <대만관계법>서명/ 1980 린이슝(林義雄) 일가 피살사건/ 1981 천운청(陳文成)사건/ 1984 『장징궈전(蔣經國傳)』 저자 강남(류이량) 미국에서 피살

1971、1975、1977台灣基督長老教會三大宣言

1971, 1975, 1977 대만 기독교 장로 교회 삼대 선언

1979 메이리다오(美麗島) 사건

1970~1980  활발한 당외운동 발발

1986민주진보당 창립

1987 대만펑후 계엄령 해체 


출판물

1975<대만정론>, 1979<80년대(八十年代)>, <메리다오(美麗島) >, 1981<선건 (深耕심경)>, 1983< 치엔진(前進전진)>, 1984<즈요쓰다이 (自由時代자유시대)>, <펑라이다오 (蓬萊島봉래도)>, <신차우리오 (新潮流신조류)>…


4. 전국민적인 광풍: 진보퇴보? (90년대)

계엄령의 해체 후 대만사회는 적극적으로 개혁에 나섰다. 1988년 장징궈(蔣經國)의 서거 후, 리덩훼(李登輝)가 총통에 당선되었다. 1990년 국민당내의 ‘주류파’와 ‘비주류파’사이의 정쟁이 격화되었다.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이전해 온 후 한번도 재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만년국회’가 어지러운 시국을 틈타 권력을 확장하려고 하자 수천명의 청년과 학생들은 중정기념당 앞 광장에서 연좌 항의를 진행하였다. ‘들백합’의 상징이 된 학생운동의 영향은 엄청났다. 그리고 이 학생운동은 같은 해 5월 총통에 임명된 리덩훼(李登輝)가 국회의 전면적 재선거 등 헌정 개혁을 추진하는 데 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 후 1994년 타이베이와 가오슝시 시장 및 대만성 성장의 직접선거와 1996년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되었고, 또한 리덩훼(李登輝)는 최초의 민선선거에서 총통으로 선출되었던 것 등은 민주제도의 개혁을 완성시켰다. 2000년, 민주진보당이 총통 선거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천수에벤이(陳水扁) 총통으로 선출되었으니 역사적인 정당교체가 일어났다.

2008년 마잉지우(馬英九)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국민당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2014년 ‘양안서비스무역협정’의 과정에서 논쟁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학생들이 입법원을 23일간 점거하는 학생운동이 발생하게 되었다.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해바라기’ 학생운동이라 명명하였다. 2016년 세 번째 정권교체로 차잉원(蔡英文)이 대만 최초의 여성 총통에 임명되게 되었다.

시대배경 1988 장징궈서거/ 1989 천안문사태/ 1990 이월정쟁/ 1995~1996대만해협미사일 위기


대만 민주의 흐름

1989 정난롱 분신

1990 들백합 학생운동

1991 100행동연맹

1992국회의 전면적인 재선거

1996총통 직선제

2000 최초의 정당교체

2008 산딸기 운동

2014 3•18해바리기 학생운동


5. 미래의 흐름: 민주의 심화

민주에 대한 재고

일제시대부터 현재까지 대만에서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민주는 무엇인가?


우리는 모두 역사의 당사자로 미래의 어떤 흐름이 되길 원하는가?

전시 리뷰 

대만이 오늘날 누리고 있는 민주와 인권의 과실은 많은 선구자들의 희생과 피눈물이 누적되어 만들어진 결과물로서 그들에 대한 진심 어린 감사와 존경을 표해야 한다. 또한 그들의 이념과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그 한계점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 밖에도 우리는 오늘날 대만이 이룩한 민주와 인권이 무엇인지 또 어떤 부분이 여전히 부족한지 다시 한번 되짚어 봐야 한다. 더 나아가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민주와 인권이 무엇인지 또 앞으로 이룩해야 할 발전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하여야 한다.